1019년 고려의 전설적 장수가 거란 대군을 전멸시킨 귀주 대첩, 1898년 종로 한복판에서 만백성이 목소리를 높인 최초의 만민공동회, 그리고 2017년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파면된 날까지. 3월 10일, 한반도의 역사는 격동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 한국의 오늘 TOP 5
1. 귀주 대첩 — 강감찬, 거란 10만 대군을 전멸시키다 (1019년)

배경: 993년 1차 침입, 1010년 2차 침입에 이어 거란(요나라)은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3차 침공했다. 거란은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겠다는 의지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고려 조정은 당시 71세의 노장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20만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게 했다.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물을 막아두었다가 적이 도하할 때 일시에 방류하는 수공(水攻) 전술을 구사하며 첫 번째 타격을 가했다.
내용: 거란군은 개경을 향해 남하했으나 고려군의 끈질긴 저항에 직면했고, 개경 공략에 실패한 채 퇴각하기 시작했다. 1019년 3월 10일(음력 2월 1일경), 강감찬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龜州, 현재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대기하다 총공격을 감행했다. 결과는 처참한 궤멸이었다. 1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병력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 《고려사》에는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미: 귀주 대첩은 살수 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이 전투 이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침공하지 못했고, 1020년 고려와 거란 사이에 평화 관계가 수립되었다. 강감찬은 고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2. 독립협회, 최초의 만민공동회를 열다 (1898년)
배경: 1896년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는 자주독립, 자유민권, 자강개혁을 핵심 이념으로 삼고 활동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었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갈수록 노골화되었다. 러시아는 부산 절영도(현 영도)의 석탄고 기지 조차, 한러은행 설립,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파견 등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이에 맞서 국민의 힘을 결집할 새로운 방식을 모색했다.
내용: 1898년 3월 10일, 독립협회는 서울 종로에서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최초의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승만, 윤치호 등이 연사로 나서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고 자주국권 수호를 역설했다. 군중은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키라", "한러은행을 폐지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대회의 압력으로 러시아는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실제로 철수시켰고, 절영도 기지 조차 요구도 철회했다.
의미: 만민공동회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민중 집회로, 시민이 직접 외교·정치 문제에 목소리를 낸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후 6차례 이상 개최된 만민공동회는 의회 설립 운동으로 발전했으나, 보수 세력의 반발로 독립협회가 해산(1898년 12월)되면서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3·1운동과 이후 민주화운동의 원류가 되었다.
3.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 창립 (1946년)
배경: 1945년 8·15 해방 직후 한반도는 정치적 혼란 속에 빠졌다. 좌우 이념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노동운동 역시 좌우로 분열되었다. 1945년 11월 좌파 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먼저 결성되어 약 50만 명의 조합원을 확보하며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우파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대항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내용: 1946년 3월 10일, 전국 각지의 우파 계열 노동조합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약칭 대한노총)을 공식 창립했다. 초대 위원장에는 전진한이 선출되었다. 창립 당시 산하 조합원 수는 약 17만 명으로, 좌파 전평에 비해 규모는 작았으나, 미군정의 지원과 이승만 세력의 후원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의미: 대한노총은 해방 후 한국 우파 노동운동의 출발점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전평이 불법화되면서 대한노총은 사실상 유일한 전국 노동조직이 되었고, 이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한국 노동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4. 대한민국과 스페인, 공식 수교를 맺다 (1962년)
배경: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아래 경제 개발과 외교 다변화를 핵심 국정 과제로 삼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외교 관계는 미국, 일본 등 소수 국가에 집중되어 있었고, 유럽과의 관계 확대가 절실했다.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체제하에 있었지만, 반공주의라는 공통 기반 위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내용: 1962년 3월 10일, 대한민국과 스페인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양국은 반공이라는 이념적 공통점과 경제 협력의 가능성을 기반으로 수교에 합의했다. 이후 1973년 서울에 스페인 대사관이 개설되었고, 마드리드에도 한국 대사관이 설치되면서 양국 관계가 본격화되었다.
의미: 한-스페인 수교는 한국의 유럽 외교 확대의 초기 성과 중 하나였다. 이후 양국은 경제, 문화, 방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발전시켰다. 특히 2000년대 이후 한류의 확산과 함께 스페인 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고, 양국 간 인적·문화적 교류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5. 박근혜 대통령, 헌정 사상 최초로 파면되다 (2017년)

배경: 2016년 10월, 최순실(최서원)의 국정농단 의혹이 JTBC의 태블릿PC 보도를 통해 폭로되었다. 대통령의 비선 실세가 국가 기밀문서를 사전 열람하고, 재벌 기업에 수백억 원의 출연금을 강요하며, 인사와 정책에 개입했다는 충격적 사실이 드러났다. 시민들은 매주 토요일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집회를 열었고, 누적 참가 인원은 약 1,700만 명에 달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는 찬성 234표, 반대 56표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내용: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인 전원일치 의견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했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국민의 신임을 배반하고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파면과 동시에 대통령 지위를 상실한 박근혜는 이후 구속 수감되어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2021년 특별사면).
의미: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파면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촛불혁명으로 불리는 이 과정은 시민의 평화적 시위가 제도적 절차를 통해 권력을 교체한 민주주의의 성숙을 보여주었다. 60일 이내에 대선이 실시되어 문재인 후보가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이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되었다.
📌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과거의 실수에서 배우고, 위대한 성취에서 영감을 얻는 것 — 그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내일은 또 어떤 역사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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